여름이 맹렬하게 익어가고 있다. 여름의 어원은 열매에서 왔다.

과일과 곡식은 한여름, 6~8월에 열매의 형태로 잘 익기 때문에 유래한다. 이때 하늘은 비로 응원하고 때로는 장마와 태풍으로 '아프터서비스'를 한다.

올 여름은 무척 덥다. 7월 중순부터 폭염이 계속 이어지고 장마는 결석이다.

간혹 비를 흩뿌리지만 폭염을 누그러뜨리기엔 역부족이다. 이 염천에 언 발에 오줌누기도 안 된다.

해서 사람들은 계곡으로 바다로, 외국으로 멀리 떠난다. 의정부 시민이라고 어딜 안 가랴만,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숲이 있는 공원에서 더위를 씻는이가 제법 있다.

의정부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형 도시이다. 도시에는 작은 산이 더러 있다. 그중에 추동공원이 있다.

추동공원은 이웃집 마실 가는 것처럼 가벼워

추동공원에 가는 일은 이웃집 마실 가는 것인양 가볍다.

운동화에 물병 하나면 충분하다. 하루하루가 미분이라면 일상은 적분쯤 되겠다. 그 일상을 적분하여 산책을 간다.

추동공원은 공원이기엔 크고 숲이기엔 좀 작은 아담한 산책 코스다. 남녀노소 누구나 어디서나 쉽게 갈 수 있다.

경사가 거의 없거나 있다손 치더라도 완만하다. 교통도 편하다. 버스와 경전철이 가까이 있어 접근성이 좋다.

추동공원은 신곡동,금오동,송산동을 아우르는 넓은 지역이다. 주변엔 주요 근린 시설이 포진되어 있다.

경기북부청사를 비롯해 백병원, 노동청, 홈플러스와 롯데마트 등의 생활편의 시설들이 있다.

폭염에 습도가 높아

날이 찌푸둥하다. 아침 공기에 습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습도가 높다.

이런 날은 산책하기 힘들다. 차라리 걷는 걸 포기하고 산에서 책을 보는 게 '산책'(?)일지 모르겠다. 콜롬비아 출신의 노벨문학상을 탄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이런 날을 이렇게 말한다.

"공기가 어찌나 축축했는지 물고기들이 문으로 들어와서는 방안 공기를 헤엄쳐 창문을 통해 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남미식 뻥이 좀 쎄긴한데 물기와 습기에 대해 이 작가보다 멋지게 표현한 사람을 아직 못봤다.

배낭에 물 한통을 넣고 출발한다. 오늘은 신곡동 과학도서관에 가서 건물 뒷편 추동공원으로 진입한다.

'여행은 가슴 떨릴 때 가야지 다리가 떨릴 때 가면 망한 것이다'라고 일본 어느 할메가 재밌게 말했다.

'나이 들면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간다'고 했지만 그래도 나이들면 육체의 한계를 무시할 수 없는 법. 나도 다리 떨리기 전에 서둘러 간다.

산책이나 트레킹 하기 전에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과학도서관 정문 50미터 못 가서 솔메초등학교가 있다. 그 학교 정문 맞은 편에 명소가 하나 있다.

핫 플레이스. 커피집이다. 참새 방앗간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가만히 놔둘 리 없다.

그런데 카페에 간판이 없다.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30평 너른 공간에 의자와 인테리어를 담백하다. 여백 있게 꾸몄다. 그 여백에 나를 채운다.

이집은 커피를 핸드드립으로 내린다. 개성 있는 카페다. 비슷비슷한 그저 그런 프랜차이즈 카페보다 이렇게 주인의 향기가 나는 커피집이 훨씬 의미 있다고 본다.

과학도서관 뒷편으로 가서 왼쪽으로 가면 추동공원 안에 있는 가장 높은 효자봉을 가는 길이다. 그래봤자 야트막한 동네 동산보다 못하지만 봉우리는 봉우리다.

거기서 여러 갈래길로 부채살처럼 퍼져 나간다.

산길이 촉촉하다. 푹신하다. 습도가 높아 땀이 배었지만 땅을 밟는 '발맛'이 리듬을 탄다.

20분 후에 효자봉 조금 못가 제법 운동기구 시설이 잘 갖춰진 쉼터가 나온다. 아침 운동 나온 시민이 예닐곱 명이 쉬거나 운동 기구에 몸을 맞긴다.

효자봉 올라가는 길목엔 베드민턴장을 천막으로 사방을 둘러 쌓아 운동 공간을 만들었다. 하늘엔 뚜껑이 열려 나무 사이로 베드민턴 공이 왔다갔다 하는 게 언뜻 보인다.

효자봉에 오르니 시에서 정자를 만들어 산불감시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신갈나무와 떡갈나무를 카메라에 담는다. 숲길을 찍는다. 공터와 정자도 찍는다. 기구에서 운동하는 이도 찍는다.

내가 찍은 피사체는 내 인식의 방에 갇힌다. 찍힌 장면은 찍히지 않은 것을 배면에 깐다. 안 찍힌 것들은 찍힌 것들의 희생양이다.

나는 보고 싶은 것만 찍는 셈이다. 그 바깥은 없는 것이나 같다. 사물의 존재가 이래도 되는가. 우리의 인식은 뷰파인더 만큼만 안다. 미국의 문화평론가인 수전 손탁은 이렇게 안타까워 한다.

"사진은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사진은 대상을 기록하는 동시에 대상을 변형시킨다.뷰파인더로 구도를 잡는 행위는 동시에 구도 밖의 대상들을 배제시키는 행위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사진 속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unseen& unreported)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효자봉은 애비봉 무척 아담해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는 여러 갈래 길이 나온다. 자칫 햇갈릴 수 있겠다.

그러나 길을 잃는다는건 즐거운 일이다. 그래봐야 금방 주택가가 나와 다시 돌아가면 될 일이다. 산책자는 길을 잃어야 길을 알게 된다.

나도 이정표 없는 여러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이 떠오른다.

가지 않은 길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몸이 하나니

두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며, 한참을 서서

낮은 수풀로 꺽어 내려가는 한쪽 길을 멀리 끝까지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 생각했는지요

풀이 무성하고 발길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그 길도 걷다 보면 지나간 자취가

두 길을 거의 같도록 하겠지만요.

그날 아침 두 길은 똑같이 놓여 있었고

낙옆 위로는 아무런 발자국도 없었습니다

아, 나는 한쪽 길은 훗날을 위해 남겨 놓았습니다

길이란 이어져 있어 계속 가야만 한다는 걸 알기에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거라 여기면서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신갈나무와 떡갈나무가 많은 트레킹 코스

신갈나무가 많은 좁장한 산길을 홀로 걷는다. 호젓하다. 15분쯤 걸으니 생태다리길이 나온다는 이정표가 있다.

신곡현대아파트에서 백병원, 금오동, 녹양동, 양주 방향으로 가는 6차선 도로가 산길을 끊어놨다.

그 길사이로 다리를 만들어 신곡동, 신명아파트 추동아파트, 벽산아파트, 건영아파트, 동신아파트 등 수많은 아파트 단지 동네와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다.

그 다리를 건너는데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었다. 풀과 꽃, 나무로 치장하여 다리라는 느낌이 안 든다. 밤에 동물들이 드나들기 좋게 흙길로 꾸몄다.

도로를 관통해서 건너는 터라 소음이 좀 났을 뿐 크게 눈에,귀에 거슬리진 않는다.

숲은 산의 상징이다

이리 저리, 이길 저길 싸돌아 다닌다. 길을 잃기도 하여 다시 되돌아 가기를 수차례.트레킹을 얼추 2시간 한 듯하다.

신곡동 키큰 신명아파트가 나뭇잎 사이로 언뜻 보인다. 신곡노인종합센터 방향으로내려 간다.

비가 온다. 소나기가 흩뿌리기 시작한다. 소설가 한강은 소설 <희랍어 시간>에서 눈과 비를 이렇게 언어로 그린다.

"눈이 하늘에서 내리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 모른다."

나는 '끝없이 긴 문장'을 5분 정도 맞으며 산책길을 내려 간다. 맞춤하게 산책을 마친다. 내가 산책을 끝내자 비도 그쳤다.

본지 객원기자 황현호(의정부 문화발전소 소장)

<본 기사는 의정부시 조례에 따른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